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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도』 , 이현석, 자음과모음(2021)

지난 해, 젊은작가수상작품집에서 「다른 세계에서도」를 읽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얼떨떨함과 감탄을 동시에 느끼고 내가 믿고 읽는 작가님 리스트에 추가했다. 그래서 이번에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고민도 하지 않고 구입했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시 읽은 「다른 세계에서도」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작품들도 읽는 내내 너무 좋았다. 마음이 싸르르해진다고 해야 하나. 소설의 소재와 인물들, 그 인물들의 시선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차가워보이는데 따뜻하다. 손을 가져다대기 전에는 따뜻한지 알 수 없는? 마냥 따뜻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좋은 의미로). 

 

여덟 개의 단편 중에서도 유독 좋았던 작품 세 가지가 있다. 의식을 잃으면 이름도 잃는(「너를 따라가면」) 세계,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는 세상(「다른 세계에서도)」, ‘과학’ 이전에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서는 중립을 따져서도 안 되고 증명이 중요하지 않은 세계(「참)」이다. 세계는 서늘하고 차갑지만 『다른 세계에서도』속 인물들은 흔들리면서도 올곧고, 자신의 소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한다. 독자인 내가 책 속 인물이라면 어땠을까 고민할 만큼 책 속 세계는 현실과 놀랄 만큼 닮았고 그들의 고민도 그저 읽고 넘길 수 없게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과 맞닿아있다. 그래서인지 한 편을 읽고 다음 편으로 바로 넘어갈 수 없었다. 

 

 

낙태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것이 여성의 권리라고 막연히 생각만 해 왔던 내게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서 받아들여지기 하기 위해 어떤 의견들이 어떤 식으로 부딪히고 있는지를 쉽게,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만들어 준 「다른 세계에서도」. 그동안 낙태를 허용하기 위해 전개되어 왔던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주체성은 지워질 것이며, 타인의 선의에 의해 구조받는 나약한 존재만으로 재현될지도 모른다.’(62쪽)는 지수의 말은 나를 반성하게 했다. 이루고자 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하는가, 결과의 방향성이 달라지더라도 결과를 얻어내면 되는 건가. 사회의 너무 많은 것들이 그런 ‘어쩔 수 없는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너를 따라가면」은 마지막에서야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등장하지만,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배경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정혜의 시선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맏이도, 아들도 아니었던 정혜가 간호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가부장제의 질서와 너무도 쉽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타지에서 온 젊은 여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여성’에 대한 혐오를 엿볼 수 있었다. 동시에 민주화 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의식을 잃으면 이름을 물어볼 수 없기 때문에 옷차림이 이름이 된다. 파추하, 청치마처럼)과 어떻게든 연대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노력까지. 그동안 읽었던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소설들 대부분이 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시민들이나 그 가족들을 주인공으로 했기 때문인지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정혜의 시선으로 전개된 소설이 신선했다. 

 

아동을 상대로 끔찍한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게 교화의 가능성이 있을까? 특히 그들이 제대로 된 형량조차 받지 않아 조만간 출소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사고로 위장하여 그들을 죽일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참」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의학 자문을 의뢰받은 진영이 교도소 재소자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을 다룬다. 징벌방에서 안면에 계구기를 쓰고 있다 천식으로 죽은 재소자, 교도소의 의무과장은 갑작스런 천식 발작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다. 조사를 하는 내내 진영은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왔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김선배와 최교수가 어떤 연구에서는 과학이니 중립을 따지는 것이 연구자가 져야 할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다면…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객관적인 진실만을 추구하다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와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읽고나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소설집을 다 읽고 나니, 최은영 작가님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작품들 속 인물들이 덤덤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섬세하고 배려가 가득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너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