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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구입한 지는 제법 됐는데 새로운 직장생활을 하느라, 날씨가 추워진 탓인지 잠이 늘어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사실 몇 주 전에 앞 부분 몇 쪽을 읽다가(그래봤자 3페이지 정도)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초반을 조금 벗어나니 뒷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게 바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저력인가 싶기도 하고. 책을 읽지만 작가 이름은, 특히나 외국 작가 이름은 기억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가즈오 이시구로는 쉬이 잊혀지지 않으며 다른 작품은 어떤지 호기심이 든다.

 

나를 보내지마, Never let me go. 제목만 보면 흡사 로맨스 소설 같다. 처음에 이북으로 구입을 했을 때만 해도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아,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면 기본은 하겠지'라는 생각이었으니까. 게다가 초반의 이야기는 그 어떠한 힌트도 없이 그저 간병사, 기증자 정도의 키워드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 소설이 SF장르라는 생각은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전혀 SF같지 않은 심리소설이랄까.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고 사실 아는 것도 없지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를 읽으며 했던 생각은 10대 소녀들의 심리가 굉장히 적나라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거였다. 흔히 또래와 집단생활을 하면서 느낄 법한 그런 심리들?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묘한 지위, 권력에서 비롯되는 미묘함 같은 것.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너무도 담담한 문체로 그려나간다.

 

 

그리고 고독이라는 문제가 있다.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하는 것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간병사가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혼자 차를 몰고 이 센터에서 저 센터로,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먼 길을 다녀야 하고, 토막잠을 자야 하고, 누구에게도 걱정거리를 털어놓을 수 없고, 누구와도 소리 내어 웃을 수 없다. 이따금 옛날에 알던 학생, 지금은 간병사나 기증자가 된 사람을 만나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충분한 기회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늘 시간에 쫓기든가 그렇지 않을 때는 극도로 지쳐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 근무 시간과 여행, 수면 부족은 존재의 내면으로 슬며시 들어와 당신의 일부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태도와 시선과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우리는 온갖 사소한 문제를 두고 줄곧 싸워 댔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루스와 나는 특히 잠자리에 들기 직전 블랙 반의 다락에 있는 내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헤일셤의 공동 침실에서 소등 후 나누었던 그런 밀담의 후속타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낮 동안 아무리 사이가 툴어졌었다 해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루스와 나는 변함없이 내 매트리스에 나란히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뜨거운 음료를 홀짝이며 새로운 생활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이런 밀담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런 때 서로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든 간에 상대가 그것을 깊이 배려하고 존중해 주리라는 믿음이었다.

 

조만간 영화로도 제작된다던데, 아마도 영화에서는 SF적 요소가 조금 더 가미되지 않을까 싶다. 약간 이퀄스 같은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개봉하면 보러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