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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람_사랑과 가장 먼 단어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제 방에는 밤이 검은 물처럼 차오른다고 천장까지 물이 차는 12시에는 잠깐 질식하지만 새벽은 유영하기 좋은 시간이죠 아침이 아직 보라색 일때는 손끝 발끝이 퉁퉁 불어 주름져요 손발만 늙어버린 거죠 그땐 휴대폰을 잡고 당신에게 연락할까 고민해봐요 늙어버린 내 손이 아직 어린 나보다 현명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해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는 딱 12시에만 꺼내봐요 하루에 두 번이나 질식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은 사랑이 전화를 받지 않고 소리샘으로 흘러드는 날 아무도 마셔주지 않는 내 이야기만 고요히 고이는 밤



당신의 창 밖에는 무엇이 피어있나요 만약 제가 피어있다면 지금 건너가겠습니다 꺾이는 것보다 지는 것이 두려워지는 봄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봄이라면 저는 만개하였습니다



내가 구구절절 이야기하면서 "가까이 와서 봐요. 저는 불행의 눈을 가졌어요."라고 말하자 "가까이 와서 봐요."의 거리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불쑥 입을 맞추고는

"키스할 때는 눈뜨는 거 아니에요."
"그러네. 이제 불행이 안 보이네요."



모두가 지구를 밟고 살진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손바닥을 밟고 산다 그 사람 손에 땀만 차도 나는 발끝까지 젖어버리는 것이다 어제는 내 머리 위 새하얀 하늘과 새까만 별에 물기가 그렁그렁 고였다 그럴 땐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젖는다 사실 젖는다기 보다는 찢긴다 손바닥이 땅이고 눈이 하늘인 이 행성에서 살아남은 법은 행성이 슬퍼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뿐이다 사랑한다는 건 타인의 우주에 수감되는 것과 비슷하다 언제 죽어도 안락사다



23p 그리움의 어원은 '긁다'이다 글과 그림도 그리움과 동일한 어원을 취한다 문자의 형태로 종이에 긁어두면 글 선이나 색으로 어디든지 긁어두면 그림 마음에 긁어 새겨둔 것은 그리움이 되는 것이다 나는 손톱이 긴 시간 속에 살고 있다

27p 연인이라는 단어는 정말 따듯하다. 따듯한 온분홍색의 단어다. 데워진 살냄새의 단어다. 사계절의 단어이고 모든 나이의 단어다. 기쁨을 가지고 오는 단어이고 슬픔이 오기 직전의 단어다. 누군기 오고 나서의 단어이고 누군가 가기 직전의 단어다. 참 좋은 시절의 단어다.

30p 너는 하얗고 하얀 가장 위험한 백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네 위에 자기 몇 자 남기려다 추락했다 가슴을 왜 젖무덤이라고 부르는지 알겠네 얼마나 많이 죽인 걸까


인간은 내면이 중요하다지만 나에게는 해부하는 눈이 없다 그저 겉만 잘 보는 탐미적인 눈알 두 개뿐


꿈속의 네가 너무나도 다정하다
깨고나면 그게 그렇게 악몽일 수가 없다


52p 이 별것 없는 사랑 속에서 앞서 떠난 자는 한 명의 종교가 되고 그 떠나간 한 명치의 그리움은 표독한 신앙이라 지나간 모든 말과 행동을 밤새워 해석하게 하고 너무 많은 사람과의 밤을 제물로 필요하게 해 그러니까 적당히 흘려듣자 우리 사랑은 흘려들을수록 아름다운 노랫말이니


나는 항상 무언가를 쏘는 삶을 꿈꿨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발포를 하고 싶었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쏘아진 총알에 책임지는 거 봤어? 나는 주인공처럼 살고 싶었어 근데 우리가 같이 영화 속에 있으면 너는 항상 쏘고 나는 항상 맞더라고 나는 그게 너무 화나 왜 주인공이 아니면 마지막에 아파야 하는 건데?

그녀는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권총을 다짜고짜 내 식도 끝까지 쑤셔 넣고는 너는 방아쇠를 삼켰으나 네 안에는 손이 없지 너는 이제 스스로 쏘아질 수도 나에게 쏘일 수도 없는 운명이 된 거야 네가 나에게 상처 줄 때 그랬잖아 언젠가는 다 사라질 것들이라고 네 목에 박힌 권총도 언젠가는 사라질 거야 너는 그 언젠가의 고통을 알아야 해

목구멍에 박힌 거대한 이물감 나를 목구멍까지 밀어 넣어줬던 여자들이 새삼 고마워졌다 이 켁켁거리는 기분을 어떻게 견뎠지 끊임없이 구역질이 났다 언젠가는 삼켜지거나 토해지거나 할 건데 그 언젠가라는 단어의 불확정성이 나를 미치게 했다 평평하고 푹신한 모래뿐인 주황색 사막에서는 이 고통을 피해 자살할 방법도 없다 그 곳엔 뛰어들 곳도 달려들 곳도 목맬 곳도 없다 사랑할 사람이 없는 곳과 동일한 곳 나는 그저 언젠가만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되어 계속 구역질만 해대고 너는 유유히 스크린을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관객석에서 내 광대 같은 모습을 보며 깔깔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