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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1987


영화가 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많이 기대했고, 개봉 후에는 꼭 봐야지 생각했는데 드디어 보게 된 1987.  혼자였다면 진작 영화를 보고 왔을테지만 부모님께서도 꼭 보고싶어하시는 영화라 가족들 모두가 시간이 될 때를 기다리다보니 오늘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왜곡 없이 다룬 영화(군함도 같은 영화는 패스하고 싶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고 흥행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몇 달 전 보았던 택시운전사는 상업영화이다보니 아무래도 흥행을 노린(?) 요소들이 많았지만(물론 영화는 좋았다) 1987은 정말 담백하게 1987년 그 당시를 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독립운동이라든지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재의 책, 드라마, 영화를 보고 있자면 늘 드는 생각이 있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도 조금이라도 아픈 건 끔찍하게도 싫어하는데 고문이라니. 우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나설 용기도, 최루탄이나 총탄에 내 몸을 내놓는 것도, 잡혀서 고문을 당하는 것도, 그 어느하나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 시대에 본인 자신이 아닌 사회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지 생각하게 되고 마음 한 편으로는 죄스러움과 고마움을 함께 느낀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도 있는 것이니까. 


1987년에 일어났던 민주항쟁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 것도 아니고, 행해진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눈에 익은 많은 배우들이 몇 분, 아니 몇 초에 스쳐 지나간다. 큰 역할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다. 여러 배우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새삼 이런 중요한 영화에 출연해 준 배우들에 대한 고마움과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행동했는지를 느끼게 된다. 엔딩크레딧에 무수히 많은 배우들의 이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영화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하나같이 인상깊었지만, 이번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 중 하나는 기자 역할을 맡은 이희준이다. 이희준이 넉살스럽게 연기를 잘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건 '기자'의 역할을 잘 그려줬기 때문이다. 최근 '기자'를 떠올리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자보다 기레기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지 않나 싶다. 특히 몇몇 신문사 기자들은 더욱 더. 그러나 1987년의 기자는 지금과는 다소 다르다. 누구보다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하고, 정부의 보도지침에 굴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거의 카메오급으로 등장했던 천만요정 오달수와 고창석. 둘은 각자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부장으로 나오는데 처음 박종철의 죽음을 알렸던 후배기자에게 잘 도망가라고 전하던 모습이나 보도지침을 쿨하게 지워버리며 사실을 알리자고 기자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참 뭉클했다. 내가 가서 고맙다고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도깨비의 비서로 유명한 조우진 배우. 박종철의 삼촌 역할을 했는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진짜 눈물났다. 싸늘한 시체로 누워 부검을 기다리는 조카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아내는 모습과 끌려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울분을 토해내는 모습이 너무나도 슬펐고 인상깊었다. 



영화 1987은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 김태리가 맡은 연희 아닐까. 대학 신입생이 된 연희는 첫미팅을 하던 날 데모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무슨 데모를 하냐며 불평을 한다. 만화동아리인줄 알고 속아서 갔던 동아리에서 5.18 민주화 운동의 실태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고서는 울며 뛰쳐나간다. 그리고 이런 걸 왜 보여줬냐며, 이걸 본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며 화를 낸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삼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삼촌 주변의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1987년에 살았다면 아마도 연희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내가 나선다고 세상이 달라질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럴 용기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연희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비로소 세상에 나선다. 

최근에 남자 배우들이 가득한 영화를 소위 알탕영화라고 부른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영화 1987 역시 남자 배우들로 가득 찬 알탕영화이며, 여자 배우는 김태리 단 한 명, 심지어 여자 배우의 역할을 수동적으로 그려냈다고 비판한다고 한다. 물론 한국 영화는 물론이고 헐리우드 영화들까지 남자 배우들이 독식하고 그들로 가득 찬 영화들이 대다수라는 것에는 동의하며 바뀌어야 할 세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1987에 이런 기준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글쎄. 1987 영화는 대부분의 실존인물에 바탕을 두고 그려지고 있다. 시대가 변했다는 지금도 이런데, 1987년에 여자가 전면에 나서서 할 수 있던 행동들이 그리 많았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1987가 그리는 실존인물들이 대부분 남자인 것을 어쩌겠는가.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는 적극적인 인물을 영화에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영화 1987만큼은 보다 더 사실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만족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오늘의 사회, 그리고 1987이라는 영화. 김윤석은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후배이며, 영화 1987에 출연한 것이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종철의 삼촌 역으로 등장한 조우진 배우와 김승훈 신부 역할의 정인기, 오달수는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다며 셀프캐스팅을 자처했다고 한다. 셀프캐스팅을 자처한 배우들, 어려운 역할들을 해 준 배우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고생을 자처했을 제작진, 그리고 1987년을 뜨거운 눈물과 피로 지나왔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참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지금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오늘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