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푸르렀고 청량했지만, 그 끝은 지독히도 쓰라렸다. "
주인공이 이병헌과 수애이니만큼 영화 제목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영화사에서 제공한 스틸컷이나 '그해 여름'이라는 영화 제목만 놓고 보면 그저 어느 여름날 젊은 두 남녀의 멜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나도 그랬고. 밀린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단순히 적적함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익숙한 한국영화였다.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장르는 역시 멜로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멜로와 1960년대말의 역사물이랄까. 마냥 가볍게 볼 영화는 아닌 듯 하다.
역사적인 사실이 조금이나마 개입 된 매체를 접할 때마다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일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간 석영(이병헌), 그저 시간이나 때우고자 왔던 농활에서 우연히 정인(수애)를 만나게 된다. 그해 여름, 그 곳에서 풋풋하고 싱그럽게 사랑을 쌓아나가는 둘. 함께 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석영은 정인과 함께 서울로 오지만, 1969년 박정희의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는 학생 무리에 휩쓸리면서 모든 것은 틀어진다.
둘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의 사이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오히려 애틋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에 빨갱이 아버지를 둔 정인의 신분, 그리고 학생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이 두 사람을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외부적인 문제 없이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소중한가. 혼란한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도록 강요 받는 이의 마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최근에 특정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지 않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배우가 어떤 인물로 영화에 나와도 똑같은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별개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배우가 나오는 작품도 마음에 꺼려져 잘 보지 않게 되는데, 이병헌은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이병헌 연기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냥 석영 그 자체라고 해야 하나. 특히 학생운동으로 잡혀 경찰서에서 수애를 모른다고 말하며 고개도 못 들고 고개만 내젓던 장면에서의 연기를 보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산타. 수애의 멜로 연기도 뭐라 흠잡을 데 없었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오달수나 유해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나 잘 있어요, 내 걱정말아요, 나 행복해요."
그해 여름, 정인이 건넸던 말은 결국 정인이 석영에게 전하는 유언과도 같았다.